지나간 추석

서울 가는 고속버스를 타기까지 2시간 30분이 남았다.
이글루스는 이 2시간 30분이 없었다면, 앞으로 또 몇 달 간 그대로 방치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돌아버릴 정도로 빨리 간다.
그런 것을 느낄 때마다 '사랑이 중요해 사랑이 중요해'라고 계속 되내인다. 

엄마 말대로라면 나는 뒤쳐져서도 늘 걸어가는 사람이지만, 생각만큼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엄마에게 말은 못했다.
'어마이, 나 생각만큼 찌질한 인생은 아니야. 행복을 표현할 줄 모르는 것 뿐이야...;' 
엄마는 그래서 또 한참동안 잔소리를 했다. 
우리 모자가 남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엄마의 잔소리는 통시적으로 증명한다.
지금 엄마는 커다란 훌라우프를 잠깐 돌린 후, 드라마를 누워서 보고 있다 잠이 들었다.

지난 밤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났다는 엄마는 산소에 갔을 때 
물끄러미 할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굉장히 치열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또 아꼈다.
남들은 두 분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엄마는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날은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가장 슬프게 당신을 보낸 사람이 엄마였으니까.
인생은 절대 한방이 될 수 없다. 켜켜히 쌓이는 게 인생이다.

아부지는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또 나갔다. 
아마 또 자전거를 타고 밤 거리를 달리고 있겠지.
아부지는 자전거를 탈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지난 밤 새벽 세시에 술 먹고 기어들어 왔을 때, 아부지는 불 꺼진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본인 표현대로 라면 '청접장 명단 생각 중'이었지만,
이 새벽에 '결혼이 얼마남지 않은 철 없는 아들'이 또 어디서 싼 웃음을 날리며 놀고 있는지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부지와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전에는 함께 고민할 꺼리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부지는 아부지의 고민을 나는 나의 고민을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고민에 대해 지나가듯 흘릴 뿐 길게 말을 나누지 않는다. 
이건 아부지를 닮은 나의 잘못이다. 낄낄;

군 제대 후 나는 진심을 들키지 않고 아주 유능하게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인간들 사는 걸 보면 진심이란게 정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어쨌거나 진심이 있다면 그건 혼자 안고 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부지는 오래전부터 그런 사람이었고, 나는 이제 아부지의 완성본 타입에 가까워지고 있다.

할아버지가 1980년대 후반에 맨땅에 꼬라박듯 박아놓은 3층짜리 집은
이제 낡을대로 낡아서 할머니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면 계단을 두 개나 지나가야 한다.
집수리를 한다는데 걸림돌이 한 두개가 아니다. 
안은 그 덕에 추석이 꽤나 즐거웠을 터. 
나도 우리 집이 먼데, 안은 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훨씬 더 멀겠지.

내일부터는 아마 전쟁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
후덕한 인간들과 경쟁을 해야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재미는 있는데, 등 토닥이며 도와주고 싶은 인간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낄낄;

결혼 날짜가 얼마 안 남았다.

 

by 김창 | 2009/10/04 22:54 | 빗맞은 안타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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